건강 에세이 (제 7 호)

-국선도 여의도 수련원- 오륜빌딩 1004호
(2007년 9월 03일) (☎ 02-780-9004)

이 주의 주제 : 대효지심(大孝之心)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 여름, 그리스 아테네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오셨다. 애들 엄마를 만나러 대사관에 갔다가, 안내를 부탁하기 위해 대사관을 들르신 선생님과 조우하게 되었다. 처음 뵙는 선생님의 모습은 시골 촌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농사꾼 모습 그대로였다. 대문호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구석이라곤 소탈한 모습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냐고 여쭈었더니, 로마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신다. 로마 관광이 너무 인상적이셨던지, 로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상기되신다. 이것저것 신상에 대해 물어 보시고 나더니, 처음 보는 나와 아내를 앉혀 놓으시고, 진한 감동을 전해 주신다.

“그게 말이야, 내가 여기저기 다 돌아다 봤지만, 시스티나 성당만한 걸 보질 못 했어.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서 어떻게 그런 위대한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난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성당을 둘러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 절퍼덕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말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울다가 또 울었어…….  참으로 슬프도록 멋있고 장엄한, 도무지 인간이 만든 걸로는 생각이 되지 않더라고……. 음…….뭐랄까. 하여튼 너무도 가슴 벅차게 감동적이었지……. 중략……. 그런데 여기 아테네도 시스티나에 견줄만한 그런 유적이 있나?”

“어쩌죠? 선생님, 눈물이 이젠 다 말라버리실 텐데요.” “어, 그래? 그거 잘 됐네. 자네가 날 좀 안내 해줄 수 있겠나?” 선생님은 내게 다가앉으시면서 반갑게 안내를 부탁하셨다.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 같으면 뵙기조차 힘든 선생님을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논문 준비 때문에 시간의 여유, 마음의 여유가 모두 없었다. 지금 같으면 만사 제쳐두고 선생님을 모시고 안내했을 터인데……. 내겐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때만 하더라도 왜 선생님께서 시스티나 성당을 보시면서 그렇게 통곡을 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시니까 그러셨겠지” 라는 정도로만 생각 하였고,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선생님께서 조금 오버하지 않으셨나 하는 느낌조차 있었다. 그런데 이십 오륙년이 지난 후에야 선생님의 그 울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래도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 그럴만한 곳에서 울음을 터트리셨지만, 나는 3호선 지하철에서 초라하게 음악 한 곡에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광화문에서 수련을 시작한 뒤로 나는 숨쉬기에 미쳐 틈만 나면 단전호흡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이놈의 호흡이 7~8년이 지났어도 어떤 때는 잘 되는 듯싶다가도 다시 하려고 하면, 처음 호흡을 하는 것처럼 도무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리저리 동작을 바꾸어가며 안간힘을 써도 안 될 때는 열이 받친다. 이 열이 단전의 열기라면 오죽 좋을까마는! 조급함이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평소 낑낑거리며 지하철에서 하던 단전호흡을 그만두었다. 대신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수련장으로 간다. 며칠 전에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Jose Cura의 "Panis Angelicus", 이 곡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모를 순수한 영원의 모음을 듣는 듯, 검게 찌들고 타들어 간, 피곤하고 힘든 내 영혼을 천사들이 몰려와 감싸고 어루만져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울었다. 하찮은 일에도 짜증을 내며 옹졸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온 가여운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불쌍하였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더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 곡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 고마워 또 울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Jose Cura와 작곡가 A. Franck를 생각하며 울었다. 이런 곳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머지 눈물을 쏟았다. 온통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음악 한 곡 속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정성과 눈물, 그리고 진한 사랑이 이렇게 깊게 배어 있는 줄을 나는 몰랐다. 비단 음악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피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지만, 그 은혜를 느끼는 대신 불평과 불만, 짜증을 내가며 지내온 것이다.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귀머거리였다. 멀쩡한 감각을 가지고 살았어도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처럼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 오버하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였다. 생존해 계시면 찾아가 뵙고 싶었다. 만일 미당 선생님이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면, 아마 선생님 손을 붙들고 울었을 것만 같다. 광화문 수련장에 들어와 홀로 앉아 호흡을 하였다. 호흡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그냥 편하게 앉아서 호흡을 하는데, 고마운 분들이 눈앞을 또 가린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인 것 같아서, 취침 전에 호흡을 하다가 자면 좋다는 법사님 말씀 따라 자기 전에 호흡을 하였다. “누어서 호흡할 때에는 양손을 배꼽 위 아래로 올려놓고, 의식을 배꼽 아랫배 밑바닥에 편히 두고 아랫배가 윗배보다 먼저 부풀어 오르게 한다.”는 글 내용대로 의식을 아랫배로 집중시켜 호흡을 해보니 정말 아랫배가 “쑤-욱” 올라오는 게 아닌가! 내가 놀라서 와! 이런!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법사님이 “그렇죠.” “그렇죠.”라고 소리가 들린다. “아니, 법사님…….” 하고 법사님을 부르다가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3시였다. 무언가 조짐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의식을 단전 깊숙이 두고 호흡을 하는데, 20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징조가 없고 집중도 되질 않는다. 꿈속 호흡체질인가 싶어 황급히 깊은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 절한다.”는 우리 속담이 요 며칠처럼 실감나는 적은 없다. 무언가 한 가지를 좋아하게 되면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정겹고 친근하게 느끼게 되는 게 인간의 심리인가 보다.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대장금”의 이영애가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한류열풍을 일으키듯이 말이다. 나는 내 심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있는 국선도가 뗄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되면서부터, 몇 천 년의 세월을 두고 국선도를 다듬고 지켜 오신 열조(烈祖 : 커다란 공로와 업적이 있는 조상)님들과 선조, 국선도 사범님들, 그리고 부모님들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다. 하늘과 땅,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 모두에게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느껴야 한다는 청산선사님의 대효지심(大孝之心)에 관한 말씀을 퍽이나 따분하게 느꼈던 내가 이제야 철이 들게 되니, 그 말씀의 의미가 비로소 새롭게 느껴지고 있다. 2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