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50대 남성들이 20대 시절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올리비아 핫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40대는 ‘블루 라군’(1988)의 브룩 쉴즈에 눈이 멀었을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블루 라군’을 방영하길래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에머럴드 빛 바다를 배경으로 브룩 쉴즈의 청순함이 다시 봐도 눈이 부셨다.

 

 

남태평양을 항해 중이던 범선이 화염에 휩싸여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다 우여곡절 끝에 무인도에 도달한 어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섬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성에 관한 이렇다 할 지식이 없었건만 결국 섹스의 신비를 터득하여 아기까지 낳는다. 영화는 그들이 결국 줄곧 아들을 찾아 헤맨 남자의 아버지에 의해 구출되는 걸로 끝이 나지만, 이 글에서는 이들이 끝내 발견되지 않고 오랫동안 무인도에서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보자.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금기로 되어 있지만 이들의 아들 딸들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또 자식을 낳으며 여러 세대가 흘렀다고 하자. 이렇게 형성된 개체군의 특징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유전적 변이가 거의 없는 개체군이라는 사실이 두드러질 것이다.

 

단 둘이 시작한 초기 개체군이나 제법 숫자가 늘어 수십 명이 된 개체군이나 유전자군(gene pool)의 기본구성에는 변함이 없다. 그저 동일한 유전자들이 여러 번 복제되어 부풀려져 있을 뿐이다. 이 가문의 시조인 브룩 쉴즈와 크리스토퍼 앳킨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여 자손들 대부분이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겠지만 지적 능력, 질병에 대한 취약성 등 다른 유전적 성향도 탁월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만일 쉴즈와 앳킨스의 유전체(genome)에 치명적인 결함유전자가 들어 있다면 이 집안은 자손 대대로 그 유전자의 저주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아주 운 좋게 필요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한.

 

 

 

자연생태계에는 이처럼 소수의 개체들, 심지어는 정자를 품은 한 마리의 암컷에 의해 시작되는 개체군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다양하지 못한 유전자군으로 시작된 개체군에서 일어나는 각종 유전적 성향을 ‘창시자 효과(founder effect)’라고 한다. 영화 ‘블루 라군’의 경우처럼 정말 저 먼 외딴 섬에 몇 마리의 새 또는 곤충이 바람에 불려가 새로운 개체군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육지에서도 때로 서식지가 단절되어 졸지에 적은 수의 개체들이 새로운 개체군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생태학자들은 이처럼 조각 나 고립된 서식지를 ‘서식지 섬(habitat island)’이라 부르는데 정작 물 위에 떠 있는 섬이 갖고 있는 속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지난 100여 년을 돌이켜볼 때 물 위의 섬들은 그리 많이 생긴 것 같지 않은데 서식지 섬들은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다. 우리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자연생태계는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많은 개체군들이 아예 절멸(extinct)하거나 절멸할 가능성이 농후한 병목(bottleneck) 상태에 빠졌다.

 

무분별한 사냥으로 1890년대에는 겨우 20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 북미 대륙의 북방바다코끼리(northern elephant seal)가 오랜 기간의 복원 노력으로 3만 마리 이상으로 증가하여 이제는 캘리포니아 주민들과 바닷가 모래밭을 두고 만만찮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길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주민들은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늘어난 북방바다코끼리를 이제 또 다시 인위적으로 솎아낼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방바다코끼리는 수적으로만 늘었을 뿐 유전적 다양성은 여전히 위험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에 수행한 어느 분자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조사한 24개의 유전자 자리 어디에도 변이가 존재하지 않는 걸로 나다났다. 이는 역사적으로 심각한 병목을 경험하지 않은 남미 대륙의 남방바다코끼리(southern elephant seal)의 유전적 변이 수준에 비하면 확실히 비정상적인 것이다. 북방바다코끼리는 덩치만 커졌을 뿐 체질은 여전히 허약한 개체군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포식동물 중 가장 우아한 몸매와 최고의 순간속도를 자랑하는 치타도 지금 심각한 병목 상태에 처해 있다. 유전적 변이의 저하가 정자 수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치타 수컷들은 아무리 열심히 짝짓기를 해도 쉽사리 암컷을 수태시키지 못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보전생물학자들이 함께 치타의 보전생물학 연구를 벌이고 있지만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비록 수적으로는 복원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방바다코끼리의 경우처럼 유전적 변이가 일정 수준으로 복원되지 않는다면 치타의 운명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리 머지 않은 장래에 이 지구생태계에서 치타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 전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래도 숭례문은 지금 서서히 옛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치타는 일단 사라지면 지금 현재 우리의 복원기술로는 되돌릴 수 없다.

 

호랑이를 비롯한 많은 대형 포유동물들은 상당히 넓은 행동권(home range)을 지키며 산다. 충분한 행동권을 유지해야 충분한 먹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영역 행동이 개체군의 밀도가 낮아지면 심각한 번식 장애를 초래한다. 만주 호랑이의 상당수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서로 짝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예전에는 서로의 행동권이 만나거나 겹치는 부분에서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할 수 있던 것이 이제는 워낙 수가 줄어들어 서로 얼굴은커녕 냄새조차 맡기 어려워졌다. 생태학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앨리 효과(Allee effect)’라고 부르는데 아마 상당수의 동식물이 겪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혼기의 여성을 보기조차 힘든 우리 농촌의 남성들은 몇 년 전부터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날아가 아내를 맞아들이고 있지만, 아무리 꽃가루를 날려보내도 사정거리 안에 암꽃이라곤 찾기 힘든 식물들은 장차 어찌 할꼬?

 

 

그런데 이처럼 치명적인 병목의 창시자 효과를 비웃기라도 하듯 몸 속에 정자를 비축한 암컷들이 성공적으로 새로운 서식지를 공략하는 종이 있어 소개한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데도 거실 한가운데로 줄지어 행군하는 아주 작은 개미를 보며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집에서 사는 집개미 중에서 아주 작다고 하여 애집개미라는 이름을 얻은 개미다. 영어 이름은 ‘파라오개미(pharaoh ant)’인데 이집트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리 부르기로 한 것이다. 개미들은 본래 어느 따뜻한 날 서로 다른 군락으로부터 날아 나온 공주개미와 왕자개미 들이 이른바 혼인비행을 하며 짝짓기를 한 다음 충분한 정자를 비축한 차세대 여왕개미가 양지바른 곳에 굴을 파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집개미의 공주들은 오라버니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정자주머니 가득 정자를 채운 다음에는 그저 여행가방이나 이삿짐에 올라타 어디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도 그곳에서 애써 같은 종의 수컷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곧바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이 같은 조금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애집개미는 지금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아파트를 석권했다. 자연계에는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불리하거나 유리한 전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개체군의 운명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개체의 수가 아니라 실제로 번식에 참여하는 개체의 수 즉 ‘유효개체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만주 어느 자연보전지역에 호랑이가 모두 1,000마리가 살고 있다 하더라도 행동권이 충분히 인접하여 있어 실제로 번식이 가능한 개체가 100마리밖에 안 된다면 만주 호랑이의 유효개체군 크기는 그저 100마리일 뿐이다. 유효개체군은 또한 짝짓기체제(mating system)의 속성에 의해 더 작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는 북방바다코끼리의 경우에는 수컷의 20% 미만이 번식 기회를 얻기 때문에 그만큼 유효개체군의 크기는 더 줄어든다.   진화에서 유효개체군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유효개체군이 작을수록 개체군내의 대립유전자 빈도가 임의로 변화하는 현상인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의 영향이 커지기 때문이다. 자연선택과 유전적 부동은 진화의 양대 메커니즘이다. 자연선택이 다분히 결정론적인 작위적 과정이라면 유전적 부동은 개체군 내의 대립 유전자 빈도가 말 그대로 임의로 변하는 무작위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유전적 부동은 종종 자연선택이 애써 다듬어놓은 적응(adaptation) 체계를 해체시켜 버린다. 자연계의 진화가 방향성을 지니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통계학적 개념으로 보면 유전적 부동은 다름 아닌 ‘표본 오차(sampling error)’에 지나지 않는다. 무작위적인 표본 추출로는 결코 훌륭한 적응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하릴없이 변화하는 유전자 빈도, 그것도 엄연한 진화의 모습이다.

 

바닷가 좁은 방파제 위를 걸어가는 주정뱅이를 상상해보라. 용케 물에 빠지지 않고 걷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 방파제가 끝없이 길다면 그 주정뱅이는 언젠가는 물에 빠지고 만다. 논리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무작위 걸음(random walk)’이라고 한다. 이는 또한 ‘도박사의 파산(gambler’s ruin)’ 모형의 기본 개념을 제공한다. 한정된 판돈을 가지고 거대한 자본의 카지노를 상대로 도박을 하면 언젠가는 파산하게 되어 있다. 유명한 컨트리 웨스턴 가수 케니 로저스(Kenny Rogers)는 그의 노래 ‘도박사(The Gambler)’에서 훌륭한 도박사는 “언제 접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언제 털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어느 판이든 딸 수도 있고 어느 판이든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정뱅이가 방파제의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걸었을 때 과연 딸지 잃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유전적 부동의 효과도 개체군마다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수많은 대립유전자들이 진화의 긴 역사 동안 유전적 부동의 영향으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지면 한 개체군에 있는 유전자들의 계보는 결국 그 옛날 단 하나의 공통조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드러난다. 시작 단계에서 아무리 많은 유전자 사본들이 존재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씩 소멸되고 결국 한 사본의 후손들만 남게 된다. 세계 여러 인류 집단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동북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남성의 Y 염색체 염기서열에 대한 분석도 비슷한 결과를 나타냈다. 이 결과들이 그 당시 인류 집단이 그 두 남녀 한 쌍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함께 존재했던 다른 미토콘드리아와 Y 염색체들이 모두 진화의 도박판에서 손을 털렸고 가장 노련한 도박사의 후손들만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물론 진화의 도박판이든 태백의 도박판이든 누가 궁극적으로 가장 노련한 도박사로 남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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